순장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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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논쟁과 가장 큰 계명 - 2019/03/31

작성자
hosannaho
작성일
2019-03-31 08:51
조회
1982
부활 논쟁과 가장 큰 계명

( 본문 : 마가복음 12:18-34 )

본문 배경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는 그 입장과 자세가 전혀 다른 사두개인까지도 예수님을 시험한 일과 한 서기관의 질문으로 시작된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현세 지향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믿고 다 안다고 생각했던 모세오경을 근거로 부활이 없다고 확신했지만 예수님은 같은 모세의 글을 증거로 하여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시고 그들이 금과옥조같이 여기던 모세오경이 친히 부활을 증거하고 있음을 천명(闡明)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첫째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와 둘째 계명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레19:18)’를 제시하시므로 ‘사랑’이 성경의 모든 율법을 관통하는 계명이자 율법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말씀과 나눔

<질문1> 마가는 사두개인들을 가리켜 한 마디로 어떠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18)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

(설명)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종교적으로 크게 두 개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제사장 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인들이고 또 하나는 이런 기득권 계층을 비판하며 영적인 개혁을 요구하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위치는 사두개인들이 더 높았지만, 신앙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훨씬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백성의 선생). 특히 사두개인들은 이두매 사람이지만 당시에 유다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을 지지하고 그와 정치적인 야합하고 있었기에 헤롯당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아주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종교적 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종파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부활’에 대한 입장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인정하고, 또 강조하고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은 현실에서 많은 것을 누리기 때문인지 부활과 내세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 즉,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만을 성경으로 존중했는데,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믿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모세오경에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도행전23:6-7>에 보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부활에 대한 것을 가지고 이 두 종파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는 것이 나올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공격하는데는 입장이 같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가운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인정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부활이 없다는 입장의 근거가 되는 신학적인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점잖은 척하며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질문2> 예수님께서 부활이 있다는 근거로 얘기하신 것은 어떤 말씀입니까? (26)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근거를 모세의 책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글에 두고 있습니까? (26)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설명)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모세오경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던 것(19절)과 같이 예수님도 그 핵심 답변을 모세오경에 속한 출애굽기 3:1-6 말씀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신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다고 생각하셨다면,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었다”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당시에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위대한 족장들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시지 않고 현재시제를 사용하신 것을 말하면서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인간적인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역사와 비밀임을 말씀하시면서,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와 영적인 세계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나눔 1)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대해 오해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질문3> 예수님과 사두개인들간의 논쟁 과정을 지켜본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무엇입니까? (28)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설명) 이 질문은 당시 랍비들 세계에서 중요한 이슈(issue)가 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모두 613개 조항으로 구분했고 그 중 사람 몸의 지체 수로 여겨지던 248개는 보다 중요한 것으로, 1년의 전체 날수에 해당하는 365개는 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랍비들은 이 많은 규정들을 전부 다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크고 무거우며 어느 것이 보다 작고 가벼운 것인지, 또는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이고 어느 것이 부수적인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따라서 한 서기관의 이 물음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잘 반영한 것으로, 가장 크고(마22:36)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한 의도 역시 그 저변에 예수님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마가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22:35>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물었다는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질문4>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1)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설명) 예수님은 두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는 <신6:5>(수직적인 관계)에서, 다른 하나는 <레19:18>(수평적인 관계)에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모든 계명들이 두 가지 이유, 곧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돕기 위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 부분(1-4,5-10계명)을 요약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첫째’(29절), ‘둘째’(31절)라고 하신 것은, ‘둘째’ 말씀을 ‘첫째’ 곧 29, 30절의 말씀보다 가볍게 여겨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단지 논리적인 순서로써 첫째와 둘째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실한 것은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마22:39>에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그와 같으니’는 ‘첫째와 동일한, 똑같이 중요한’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눔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기도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첨부파일 : 20190331-soonjang.hwp